2025년 APEC 정상회의는 단순한 경제협력의 장을 넘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세력 재편’을 상징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 일본, 호주가 주도하는 ‘경제안보 연합’이 공급망, 기술, 에너지 등 핵심 분야에서 협력 강화를 선언하면서, 한국의 외교·산업 전략에도 새로운 방향 전환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드러난 흐름은 단순한 경제 협력의 확대가 아니라, ‘안보와 산업이 결합된 경제블록화’의 가속화입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중심으로 반도체, 배터리, 희소금속 등 전략 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추진하고 있으며, 일본과 호주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 및 자원 공급국 역할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한국은 단순한 참여국을 넘어, 동맹국 간 기술표준과 공급망 정책을 연결하는 중간축으로서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 APEC을 통해 드러난 ‘경제안보 블록화’의 신호
이번 APEC 회의에서 미국, 일본, 호주는 “Resilient and Trusted Supply Chain(복원력 있고 신뢰 가능한 공급망)”을 공동 비전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구조에 대한 대항 전략이자, 민주주의 진영 중심의 산업협력 구도를 강화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세 나라는 반도체 장비, AI 기술, 핵심 광물 공급망에서 공동 표준과 인증체계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역내 산업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는 미국이 ‘중국과의 디커플링’ 대신 ‘디리스킹(De-risking)’으로 접근 방식을 조정하면서도, 기술안보와 첨단산업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습니다. 일본은 이 기조를 지지하며 반도체 소재와 장비, 배터리 원료 분야에서 미국과의 기술동맹을 강화하고, 호주는 희토류와 리튬 공급의 안정화를 통해 자원 측면의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한국의 위치: 동맹국과 중국 사이의 복합적 균형
한국은 이러한 ‘경제안보 블록화’ 흐름 속에서 외교·산업적으로 복합적인 균형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미국 중심의 기술 블록에 참여하면서도, 중국과의 교역 의존도를 완전히 줄이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국의 대중 무역 비중은 여전히 20%를 상회하며,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등 주요 산업은 중국과 긴밀한 공급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전략은 ‘편승’이 아닌 ‘연결’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즉, 미국·일본·호주 연합의 기술표준과 산업 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되, 중국과의 협력 축도 유지하는 ‘이중 네트워크 전략(Dual Network Strategy)’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는 ‘전략산업 공급망 위원회’를 통해 국가별 리스크를 모니터링하고, 동맹국 간 기술 협력과 중국 내 생산라인의 분산을 병행 추진 중입니다.
📈 기술·자원 동맹 속에서의 한국 산업 대응전략
향후 5년간 한국의 산업정책은 기술·자원·시장 세 축을 기반으로 한 ‘3D 대응전략(Diversify·Digitalize·Decarbonize)’이 핵심이 될 전망입니다. 첫째, 공급망 다변화(Diversify)입니다. 한국은 동남아·인도 등 신흥국과의 협력을 확대해 중국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둘째, 디지털화(Digitalize)를 통해 AI 기반 공급망 예측, 스마트 물류, 사이버보안 강화로 효율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셋째, 탈탄소화(Decarbonize)를 통해 ESG 기준에 부합하는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반도체·배터리·소재 산업에서의 동맹국 협력은 한국의 기술주도권을 공고히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 장비 수입의 일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국산화 확대, 호주·캐나다 등 자원국과의 희소금속 장기계약 체결, 미국의 IRA 정책에 맞춘 현지 생산기지 확대가 주요 전략으로 꼽힙니다.
🧭 한국의 선택지: ‘균형 외교’와 ‘기술 리더십’의 결합
결국 한국이 직면한 과제는 단순히 어느 편에 설 것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균형 외교’를 기반으로 기술 리더십을 확보해, 동맹국 간 협력과 중국 시장 접근성을 동시에 유지하는 전략적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은 세 가지 축의 접근이 요구됩니다.
첫째, 외교적으로는 미국·일본·호주와의 협력 채널을 강화하되, 중국·ASEAN 국가들과의 다자 협의체를 통한 완충 지대를 확보해야 합니다. 둘째, 산업 측면에서는 핵심 기술의 국산화와 글로벌 표준 참여를 통해 기술 주도권을 확립해야 합니다. 셋째, 기업 차원에서는 ESG·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여 글로벌 밸류체인 내 신뢰를 강화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5년은 한국이 ‘산업 중심국가’에서 ‘전략 허브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입니다. APEC을 통해 가시화된 미국·일본·호주의 연합 구도 속에서, 한국이 중간 축으로서 조정력과 기술력을 동시에 확보한다면, 아시아-태평양 경제질서에서 새로운 균형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